보도자료

[우리말과 한국문학] 사복 설화가 전하는 네 가지 의미_정우락

2021년 admin 21-05-07 419

제목: [우리말과 한국문학] 사복 설화가 전하는 네 가지 의미

매체: 영남일보

일자: 2021-04-29

전문: https://www.yeongnam.com/web/view.php?key=20210427010003913


신라十聖 사파가 죽은 母 업고
연화장 세계에 들어간 얘기 속
'윤회' '효' '묵언' '불국토' 사상
생사 번뇌와 열반 다르잖다는,
깨달음의 길서 만난 중요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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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우락 경북대 인문대학 국어국문학과 교수

신라의 10대 성인은 누구일까? 삼국유사 흥법편에 보면, 흥륜사 금당에 이분들이 모셔져 있다고 했다. 아도, 염촉, 혜숙, 안함, 의상, 표훈, 사파, 원효, 혜공, 자장이 바로 그들이다. 여기에는 우리에게 익숙한 의상, 표훈, 원효, 자장도 있고, 신라에 불교를 전파한 고구려 승려 아도와 최초의 순교자 염촉(이차돈)도 있다. 그러나 혜숙, 안함, 사파, 혜공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이 가운데 우리는 사파(蛇巴)에 관한 이야기를 함께 나누기로 한다.

삼국유사 의해편 사복불언(蛇福不言)조에 사파 이야기가 있다. 그는 사복(蛇福) 혹은 사동(蛇童)으로 불렸다. 과부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12세가 되도록 말도 못하고 걸을 수도 없어 뱀처럼 배로 기어 다녔기 때문이다. 어머니가 죽자 원효를 찾아가 "그대와 내가 옛날 경전을 싣고 다니던 암소가 죽었으니 같이 장사를 지내자"라고 하면서 상례를 치른다. 그리고 띠풀을 뽑고 그 아래로 열린 찬란한 세계로 어머니의 시체를 메고 들어갔다. 땅은 곧 닫혔다.

이 설화에는 첫째, 윤회사상이 나타난다. 사복의 어머니는 전생에서는 불경을 싣고 다니던 암소였고, 현생에서는 장애인 아들 사복을 키우는 여인이었으며, 죽은 후에는 띠풀 아래 펼쳐진 연화장 세계로 들어간 불보살이었다. 축생에서 인간으로 윤회하다 불보살로 해탈한 것이다. 윤회는 인간이 죽어도 그 업(業)에 따라 지옥 등 육도에서 생사를 거듭한다는 불교사상이다. 자업자득에 기초한 이 사상은 윤회에서 벗어나는 해탈을 목표로 한다.

둘째, 효사상이다. 사복은 12세까지 말을 할 수 없고 걷지 못하는 장애인이었다.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가 구체적으로 나타나 있지는 않지만, 사복을 키우기 위한 그녀의 노력은 눈물겨운 것임에 틀림이 없다. 이에 그는 원효에게 청하여 포살(布薩)의식을 거행한다. 포살은 생전의 참회를 통해 열반에 이르는 의식이다. 이를 통해 더 이상의 괴로움이 없는 연화장 세계로 어머니와 함께 들어갔다. 효는 곧 해탈의 윤리임을 이렇게 보였던 것이다.

셋째, 묵언사상이다. 사복불언의 '불언(不言)'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그는 말하지 못했지만 성자였다. 어머니가 죽자 말문이 트이고 일어나 걸었지만, 원효가 포살수계를 하면서 죽은 그의 어머니를 향해 "태어나지 말 것이니 그 죽는 것이 괴롭고, 죽지 말 것이니 그 태어남이 괴롭도다"라고 하자 '말이 너무 번거롭다'라고 했다. 이에 원효는 "죽고 사는 것이 괴롭도다"라고 고쳐 말했다. 최소한의 정확한 말만 허용한 것이다.

넷째, 불국토사상이다. 이는 자신들이 사는 땅을 곧 부처의 나라로 믿는 사상이다. 사복은 어머니의 시체를 메고 신라 땅의 띠풀을 뽑은 곳에 펼쳐진 연화장 세계로 들어갔다. 여기에 대하여 일연은 "띠풀의 줄기를 뽑으니 그 밑에 찬란하고 청허한 세계가 나타났다. 칠보로 장식된 난간의 장엄한 누각은 인간의 세상이 아닌 것만 같았다"라고 썼다. 우리가 살고 있는 발 밑이 바로 극락이라는 논리다. 원효가 중국 유학을 포기한 이유이기도 하다.

사복 설화는 윤회를 벗어나 해탈에 이르는 길을 제시한다. 그러나 일연은 이 이야기 끝에 "괴로운 생사가 원래 괴로움은 아니니, 연화장과 생사의 세계는 넓기도 하네"라고 하였다. 자신이 소개한 앞의 이야기를 부정하는 듯한 발언이다. 즉 생사 번뇌와 연화장의 열반이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깨달음'의 여부에 따라 번뇌와 열반이 결정된다는 것을 알게 된다. 위의 네 의미는 바로 깨달음의 길에서 만난 중요한 지표가 아닐 수 없다.

 정우락 경북대 인문대학 국어국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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