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도자료

[우리말과 한국문학] 쌀과 벼와 나락 이야기_김덕호

2021년 admin 21-07-12 400

제목: [우리말과 한국문학] 쌀과 벼와 나락 이야기_김덕호

매체: 영남일보

일자: 2021-06-24

전문: https://www.yeongnam.com/web/view.php?key=20210623010002895


언어는 문화와 역사를 품은
인간정신을 담아내는 그릇
쌀과 벼, 나락의 언어기원과
단어분화 다양성 고려하면
우리의 食문화 엿볼 수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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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덕호 경북대 인문대학 국어국문학과 교수

언어는 인간이 문화적인 삶을 영위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능력이다. 언어는 정신 활동의 소산인 문화를 담아내는 중요한 그릇이다. 또한 언어의 추상은 문화의 집단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 삶과 문화를 공유하는데 중요한 대상일수록 언어의 추상은 다양하게 이루어진다. 에스키모인에게 눈(雪)은 중요한 대상인데, 이를 분류하는 단어만 해도 수십 종이 된다고 한다.

우리 민족의 먹거리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이 벼다. 벼를 찧어서 쌀을 만들고, 쌀로 지은 것을 밥이라고 한다. 나락은 벼를 뜻하는 방언인데, 한반도 남부에 널리 퍼져 있는 대표적인 표현이다. 한반도에는 쌀과 벼와 나락이 있다. 이들 중에 어느 것이 가장 오래된 말일까?

인도의 허왕후가 가야의 수로왕(서기 42~199년 재위)에게 시집오면서 가져온 물건 중에 벼(쌀)가 있었다고 하면서 고대 인도어인 드라비다족의 타밀어 biya/pyo, sor/hal이 현재 벼·쌀과 발음이 유사하므로 기원으로 보기도 한다. 그런데 한반도에서 벼를 재배한 시기는 훨씬 이전이다. 1991년 일산 신도시 개발 중에 발견된 가와지볍씨는 벼재배의 기원을 5천년 전 신석기시대로 당겨 놓았다. 벼와 쌀이 인도에서 온 말이라고 인정하더라도 나락이란 말은 어디서 온 것일까? 일설에는 라록(羅祿)이라 하여 신라 때 관리에게 곡식으로 녹봉을 주면서 나락이 되었다는 민간어원도 있지만 믿을 만하지 않다.

통상 곡식의 알이 낟인데, 낟알은 껍질을 벗기지 않은 곡식의 알갱이를 말한다. 낟은 기원이 정말 오래된 고유어로 추정된다. 그 이유는 낟에서 분화된 말이 많다는 사실이다. 낟알이 붙은 채로 쌓은 것을 낟가리라고 하는데, 볏단을 쌓은 더미를 볏(낟)가리라고 한다. 또한 나락이란 말의 생성 과정을 보면 낟+알→나달→나락의 어형 변화를 겪으면서 이루어진 것으로 보고 있다. 나락에서 분화된 말도 나락이삭, 나락모가지, 씬나락, 나락씨, 나락종자 등이 있으므로 이 말도 생산성이 높은 기원어일 것이다. 어쩌면 기원이 불분명하고 지역에 널리 분포된 나락이 가장 오래된 말이 아닐까.

쌀과 벼와 나락은 우리의 먹거리 문화에 있어서 중요한 기반이므로 여기서 분화되거나 관련된 단어가 아주 많다. 벼를 잘 몽글이지 않아서 꺼끄러기가 많은 벼를 껄끄렁벼라고 하고, 까끄라기가 유독 길게 붙은 벼를 까라기벼라고 한다. 잘 몽글인 벼를 몽근벼라고 한다. 쌀로 도정하기 위해 말리는 벼는 우케라고 한다. 이삭은 벼를 수확하고 난 뒤에 논밭에 흩어져 있는 낟알을 말한다. 또한 벼에서 나온 쌀을 볍쌀이라고 한다. 볍쌀은 끈기가 많고 적음에 따라 찹쌀과 멥쌀 혹은 입쌀이라고도 부른다. 입쌀로 지은 밥이 이밥이다. 죽을 끓일 때 넣는 쌀을 심쌀, 잡곡 위에 조금 얹어 안치는 쌀을 웁쌀이라고 한다.

벼를 찧어서 겨(껍질)를 벗겨 내는 일을 도정(搗精)한다고 하는데 우리말로 쓿는다라고 한다. 벼를 쓿어서 왕겨(겉겨)만 벗기고 속겨(쌀겨)는 그대로 둔 쌀이 메조미쌀 혹은 현미이다. 속겨를 벗기고 깨끗하게 된 정백미를 쓿은쌀 혹은 아주먹이라고 한다. 깨끗이 쓿지 않아서 겨가 많이 섞이고 빛이 깨끗하지 않은 쌀을 궂은쌀, 찹쌀에 섞인 멥쌀 비슷한 하등품 쌀을 물계라고 한다.

언어는 인간의 정신을 담는 그릇이며, 인류의 문화와 역사를 온전히 품고 있는 집이기도 하다. 언어에는 사람들이 이룩한 문화의 흔적이 고스란히 새겨져 있기도 하고, 대상의 범주가 다양하게 분화되기도 한다. 이러한 단어 분화의 다양성을 고려하면 우리 민족에게 쌀과 벼와 나락은 중요한 문화의 대상이 분명하다.

 김덕호 경북대 인문대학 국어국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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