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도자료

[우리말과 한국문학] 다시 원효에게 길을 물어_정우락

2021년 admin 22-01-03 335

제목: [우리말과 한국문학] 다시 원효에게 길을 물어_정우락

매체: 영남일보

일자: 2021-12-23

전문:https://www.yeongnam.com/web/view.php?key=20211222010002625



원효의 경전 '금강삼매경소'
모순과 대립의 논리 회통해
불교의 화쟁사상을 집대성
긍정·부정의 이분법 넘어서
사회 모순과 분쟁 해결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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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우락 경북대 인문대학 국어국문학과 교수

삼국유사 의해편에 원효불기(元曉不羈)조가 있다. 일연은 이를 통해 어떤 범주나 굴레에도 얽매이지 않는 원효상을 제시하였다. 원효는 얽매이지 않았기 때문에 요석공주 사이에서 설총을 낳았고, 또한 광대들이 사용하는 괴이한 박을 얻어 화엄경의 '일체 무애인은 한 길로 생사를 벗어난다'는 구절에서 무애라고 이름을 짓고, '무애가'를 부르며 수많은 마을로 돌아다니며 노래와 춤으로 대중을 교화했다.

원효하면 우리는 요석공주와의 로맨스, 무애가와 무애무로 펼치는 대중교화, 그리고 해골바가지 물로 인한 깨달음 등이 떠오른다. 기실 원효는 28세(645)에 의상과 함께 현장삼장의 교종을 배우러 당나라로 가기 위하여 요동으로 갔다가 고구려 순라군에게 잡혀 정탐자로 오인을 받고 다시 신라로 돌아온다. 이 과정에서 생긴 것이 저 유명한 해골물 설화다.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의 도를 깨달았으니 굳이 당나라로 가서 유학할 필요가 없었다. 원효는 깨달음을 얻어 당나라로 유학가지 않았지만, 그의 이름은 중국에까지 알려져 '송고승전(宋高僧傳)'에 올랐다. 이는 그의 지독한 공부 덕분이었다. 원효의 저서는 80부 150여 권에 이르는 것으로 추산하지만, 현전하는 저술 가운데 온전히 남아 있는 것은 13부 17권이며, 부분적으로 전하는 것도 12부 안팎이다. 이들 저서 가운데 3권으로 된 금강삼매경의 주석서 금강삼매경소는 특별히 중요하다.

원효의 금강삼매경소는 금강삼매경론으로 개칭하여 중국에서도 널리 읽혔다. '소'를 '론'으로 바꾼 것은 이 책을 더욱 높이기 위한 조처였다. 원효는 이 책을 통해 분석하고 비판하여 긍정과 부정의 두 가지 논리를 회통시켜 보다 높은 차원에서 새로운 가치를 찾아야 한다고 했다. 이러한 생각은 중국을 포함한 당대의 동아시아 지식인에게 널리 호응을 얻었고, 송고승전에는 이 책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신비화시키기까지 했다. 잠시 들어보기로 하자.

신라왕의 부인이 머리에 심한 종기가 생겨 백방으로 노력하였으나 아무런 효험이 없었다. 이에 왕은 사신을 보내 당나라에 가서 약을 구해오게 했다. 사신이 바다를 건널 때 어떤 노인이 나타나 사신을 맞아 바다로 들어갔다. 용왕이 흩어진 금강삼매경 30장 정도를 주면서 대안(大安) 성자로 하여금 이 경전의 차례를 바로잡아 책을 만들도록 하고, 원효 법사를 청하여 경소(經疏)를 지어 강독하게 하면 부인의 병은 틀림없이 나을 것이라 했다.

사신이 귀국하여 왕에게 보고하고 왕은 대안으로 하여금 금강삼매경을 편차하게 하였다. 그리고 대안은 속히 원효를 찾아 해설하고 강설할 수 있도록 했다. 이에 원효는 그 경을 받아 소의 두 뿔 사이에 붓과 벼루를 두고 처음부터 끝까지 소 수레 위에서 금강삼매경의 주석서를 썼다. 이렇게 해서 탄생한 금강삼매경소, 원효가 이 책을 강설하자 왕비의 병이 씻은 듯이 나았다고 한다. 신비한 경전과 위대한 선사의 강설 덕분이었다.

원효는 요석공주와 혼인하며 성속을 넘어섰고, 해골 물을 마시고 중국과 신라를 넘어섰다. 모순과 대립을 하나의 체계 속에 회통시키는 논리가 바로 원효 사상의 핵심인 '화쟁'이다. 그가 금강삼매경을 통해 말하고자 했던 요지도 이것에 다름 아니다. 결국 유와 무, 긍정과 부정의 이분법을 넘어서야 진여실상(眞如實相)을 볼 수 있다. 우리 시대에 발생하는 수많은 모순과 분쟁들, 해결 난망이다. 원효에게 다시 길을 물어야 하는 이유다.
정우락 경북대 인문대학 국어국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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