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도자료

[우리말과 한국문학] 까마득한 날에, 광야로 game in_안주현

2021년 admin 22-01-19 342

제목: [우리말과 한국문학] 까마득한 날에, 광야로 game in_안주현

매체: 영남일보

일자: 2021-12-30

전문: https://www.yeongnam.com/web/view.php?key=20211229010003550


언어의 문법·형태·의미 변화
언중 통해 필연적으로 발생
광야의 뜻 시대 따라서 변모
이육사와 그룹 에스파 통해
우리말 더 풍부하게 만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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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주현 경북대 인문대학 국어국문학과 연구교수

"까마득한 날에 하늘이 처음 열리고, 해 뜨는 동해에서 해 지는 서해까지, 광야로 game in"

이 칼럼의 제목을 보았을 때 독자들은 가장 먼저 무엇을 떠올렸을까?

언어는 고정된 것이 아니다. 언어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소리, 어휘, 문법, 의미가 끊임없이 변화한다. 따라서 형식적으로는 똑같이 쓰이더라도 그 의미는 사용하는 사람에 따라 조금씩 차이가 날 수 있다.

광야(曠野/廣野) '001' 텅 비고 아득히 넓은 들.

위는 웹 기반 사전인 우리말샘에 나와 있는 '광야'의 뜻풀이이다. 이 정보를 통해 광야에는 '텅 비고 아득히 넓은 들'이라는 의미 하나만 존재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여러분이 생각하는 광야도 단지 저 의미 하나뿐인가?"라고 묻는다면 아마 열에 아홉은 "그렇지 않다"라고 대답할 것이다. 사실 광야는 들이나 언덕, 시장이나 골목처럼 일상적으로 널리 쓰이는 어휘는 아니다. 국토의 70%가 산지인 한반도에서 텅 비고 아득히 넓은 땅을 보기도 어려울뿐더러 한국인에게 광야는 일상어라기보다는 문학 작품에나 사용되는 은유적 표현에 가깝다.

그래서 아마도 가장 많은 사람들이 떠올린 '광야'의 이미지는 시인 이육사가 만들어놓은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리는 공간,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이 목놓아 부르는 공간'일 것이다. 어쩌면 필자와 나이가 비슷한 사람들은 가수 안치환이나 김광석의 목소리로 아련하게 울림을 주던 '뜨거운 남도에서 광활한 만주벌판'까지의 공간을 떠올릴지도 모르겠다. 만약 여기까지 읽고도 이 글의 진지함 대신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고 있다면, 여러분은 에스파(aespa)를 따라 '광야로 game in'할 준비가 된 분들일 것이다. 참고로 에스파는 2020년 11월에 데뷔한 4인조 걸그룹으로, 발표하는 곡에 일반적인 걸그룹과는 어울리지 않는 어휘인 '광야'를 가사에 자주 사용해 일종의 '광야 밈(meme)'을 생산하고 있다.

지난 9월 전 국민이 드라마 '오징어 게임'에 빠져있을 때, 오징어 게임만큼이나 우리의 자긍심을 높여주는 사건이 있었다. 그것은 옥스퍼드 영어 사전에 무려 26개의 한국어 단어가 한꺼번에 추가된 것이다. 운이 좋게도 지난 11월에 필자가 소속된 BK교육연구단에서는 이러한 성과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옥스퍼드 영어 사전의 자문위원 Jieun Kiaer 교수님의 특강을 개최했다. 그런데 재밌는 사실은 Jieun Kiaer 교수님이 등재된 26개 단어 중 애착이 가는 단어로 가장 먼저 '스킨십(skinship)'을 꼽았다는 점이다. 콩글리시(Konglish)라고 우리 스스로를 검열하던 단어가 당당하게 최고 권위의 영어 사전에 등재된 것이니 어찌 기특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2021년에 새롭게 불리는 광야는 무엇일까? 이육사의 광야가 일제의 억압과 폭정을 극복한 미래 현실의 공간이라면, 에스파의 광야는 그 어떠한 제약도 존재하지 않는, 현실과 가상의 경계마저 허물어진 무한한 가능성의 공간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언어 변화는 사람들이 언어를 사용하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발생한다. 그리고 그러한 변화는 보통 기존의 언어적 가치를 떨어뜨리는 것이 아니라 그 언어를 더 풍부하게 만드는 데 기여한다. 언중은 기발하고 놀라운 언어 직관을 사용해 우리말을 더 풍부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이에 대한 평가는 국어학자가 아니라 시간이 담당하게 될 것이다.

 안주현 경북대 인문대학 국어국문학과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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