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도자료(3단계)

[우리말과 한국문학] 사람과 돌의 대화

2019년 bae 19-09-27 691

제목: [우리말과 한국문학] 사람과 돌의 대화

매체: 영남일보

일자: 2019-092

전문: http://www.yeongnam.com/mnews/newsview.do?mode=newsView&newskey=20190926.010300814320001


승전의 화엄학 강의 들은 돌

정경세에게 작명 요구한 돌

깨달음과 결부되는 공통점

아무 말없이 곁에 있는 돌

편안해지고 마음도 밝아져


사람 사이의 소통은 말과 글, 혹은 몸짓으로 한다. 몸짓이 원초적인 소통의 수단이라면, 말과 글은 그 뒤에 등장한 좀 더 세련된 소통 수단이다. 그런데 몸짓은 원초적인 것이기는 하지만 가장 높은 단계의 소통 수단이기도 하다. 둘 사이의 정서적 긴밀성이 확보되면 정교한 논리를 갖춘 말과 글보다 더 확실한 소통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신윤복의 ‘월하정인도(月下情人圖)’ 화제에 “달빛 침침한 깊은 밤, 두 사람의 마음은 두 사람만이 아네”라 한 것에서 이를 바로 확인할 수 있다.

남녀 관계가 아니라 하더라도 친구나 가족 등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사람들 사이에는 눈짓 혹은 손짓 하나로 서로의 마음을 읽는다. 여기는 두 사람의 진정성과 함께 오랫동안 익혀온 신뢰가 구축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인간과 돌의 소통은 어떻게 이루어질까? 가능하기는 한 것일까? 그런데, 옛 문헌에는 이러한 경우가 가끔씩 기록되어 있어 흥미롭다. 사람이 먼저 말을 걸기도 하고, 돌이 먼저 말을 걸기도 한다.

사람이 먼저 돌에 말을 건 경우는 삼국유사 ‘승전촉루’에 나타난다. 승려 승전은 일찍이 배를 타고 중국에 가서 현수국사의 강석에 나아가 오묘한 불법을 전수하고 그 스스로도 미묘한 것까지 연구하며 깊은 사색을 거듭하였다. 승전은 고국으로 돌아오면서 화엄범어 등의 책을 가지고 와서 의상에게 보였고, 의상은 문하의 제자들에게 책의 내용을 세상에 알리도록 하였다. 일연은 삼국유사에서 “이 글을 살펴보면 원만하고 융통한 가르침이 우리나라에 널리 펼쳐진 것은 진실로 승전법사의 공이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승전이 화엄학을 대중에게 알릴 때이다. 지금의 김천 지역에 들어가 절을 짓고 이 사상을 전파하였다. 그런데 승전은 화엄학을 사람들이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자, 돌 80여 개를 사람 형태로 만들어 화엄경을 설하였다고 한다. 이에 돌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승전의 강의를 들었다. 아! 이보다 더 깊은 학문적 대화가 있겠는가! 돌도 알아들을 수 있는 천상의 강의! 승전이 강의한 곳은 갈항사로 지금의 김천시 남면이고, 그때 제작한 것으로 보이는 돌 수십 구가 근년에 발굴되기도 했다.


돌이 먼저 사람에게 말을 건넨 경우는 대구부사를 역임한 정경세의 ‘우암설(愚巖說)’에 나타난다. 정경세는 1603년 상주의 우산동천에 초당을 짓고 살게 된다. 그러던 어느날 집의 동북쪽 모퉁이에 있는 커다란 돌이 꿈속에 나타나 말했다. 무릇 세상의 모든 사물은 이름이 있는데 자신은 이름이 없다면서 마땅한 이름을 지어달라는 것이었다. 지금까지 이름을 구하지 않았던 것은 자신에게 이름을 지어줄 만한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라는 말도 덧붙였다. 이제 정경세 같은 사람을 만났으니 자신도 이름을 가질 때가 되었다는 것이다.

정경세는 돌이 아무런 특징이 없기 때문에 이름을 지어 주기가 곤란하다고 했다. 이 말을 듣고 바위가 “이 산기슭에서 무너져 내리는 언덕 같은 세찬 물살 속에서도 쓰러진 적이 한 번도 없다”라고 하면서 이것을 생각하면서 이름을 지어보라고 했다. 이에 정경세는 돌이 세찬 물살 속에서도 굳건히 버티고 있으며, 자신이 사는 곳의 땅 이름도 우산(愚山)이고, 자신 같은 못난 사람이 이웃하였으니 ‘바보바위(愚巖)’라 하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했다. 그러자 그 바위는 “좋다”라고 답했고, 정경세 스스로는 잠에서 깨어나 우복(愚伏)으로 자신의 호를 삼았다.

승전의 돌과 정경세의 돌은 서로 다르다. 승전의 돌이 어려운 화엄경을 알아듣는 돌이었다면 정경세의 돌은 어리석음의 중요성을 깨닫게 하는 돌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돌은 결국 승전과 정경세 자신의 깨달음과 결부되어 있다는 측면에서 동질성을 갖기도 한다. 나의 연구실 한 편에도 못생긴 돌 하나가 있다. 어떤 땐 그 돌은 내가 종일토록 앉아 무엇에 끙끙대는 것을 지켜보기도 하고, 또 어떤 때는 문제가 잘 풀려 내가 희열을 느끼는 것을 보기도 했다. 그러나 그 돌은 아무 말이 없다. 나는 그 말없음에 대하여 편안함을 느끼며 마음도 밝아진다. 아무래도 이 가을 들머리에서 나도 서서히 돌이 되려나 보다.
정우락 경북대 국어 국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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