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도자료

[우리말과 한국문학] '송담 채응린의 압로정과 소유정'

2020년 ssy0805 21-03-03 488

제목: [우리말과 한국문학] '송담 채응린의 압로정과 소유정'

매체: 영남일보

일자: 2020-12-17

전문https://www.yeongnam.com/web/view.php?key=20201216010002250


조선 문인묵객 시문 나누던
금호강변 대구 대표 두 정자
노계 '소유정가' 작품도 남겨
인물·역사 살아 숨쉬는 樓亭
지역 문화명소로 주목할 만 


"십 년을 경영하여 초려삼간 지어내니/ 나 한 칸, 달 한 칸에, 청풍 한 칸 맡겨두고/강산은 들일 데 없으니 둘러 두고 보리라."

이 시조는 조선 중기의 문신이며 강호가도(江湖歌道)의 선구자로 알려진 면앙정 송순(宋純, 1493-1583)의 작품이다. 송순은 관직에서 물러난 뒤 고향인 전남 담양에 면앙정이라는 정자를 짓고, 자연을 벗 삼아 시가를 읊조리며 자적(自適)한 삶을 살았다. 이렇듯 송순의 면앙정과 그의 시가 작품들은 조선조 선비들의 누정문화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라 할 수 있다.

조선시대 대구에도 금호강을 따라 아름다운 누정들이 많았다. 그중 압로정(狎鷺亭)과 소유정(小有亭)은 조선 중기 대구지역의 문인이었던 송담(松潭) 채응린(蔡應麟, 1529~1584)이 지금의 검단동 금호강변 왕옥산 기슭에 경영한 누정들이다. 채응린은 본관이 인천으로 일찍 과거를 포기하고, 33세 때인 1561년쯤 이 두 정자를 건립하여 종신토록 이곳에서 강학과 수양에 매진하였던 인물이다. 또한 조선 중기 대구지역을 대표하는 유학자였던 낙재(樂齋) 서사원(徐思遠, 1550~1615)이 17세 때 부친의 명으로 압로정에서 공부를 하였고, 한강 정구의 문인으로 알려진 석담(石潭) 이윤우(李潤雨, 1569~1634)가 그의 사위였을 만큼 대구지역의 유학을 선도하였던 인물이 채응린이었다.

압로정의 압로(狎鷺)는 '해오라기와 함께 노닌다'라는 의미로 강호에 은거함을 이르는 말이며, 소유정의 소유(小有)는 '소유청허지천정(小有淸虛之天亭)', 즉 하늘에 있는 정자를 의미한다. 이처럼 채응린은 이 두 정자를 통해 자신이 꿈꾸는 이상 세계를 실현하고자 하였다. 그가 쓴 '소유정' 시를 보면 "산수를 논평하는 것은 바깥 세상사가 아니고(評水評山無外事)/ 평생에 단지 원하는 것은 고인을 만나는 것이라네(生平只願古人過)"라고 노래하였는데, 논어의 '요산요수(樂山樂水)'의 경지와 공부를 통해 옛 성현들을 만나고자 하는 그의 뜻이 잘 드러난다.

채응린이 세웠던 압로정과 소유정은 이후 많은 굴곡을 겪게 된다.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왜적에 의해 소실되기도 하고, 임란 이후 중건되었다가 1673년에 다시 불타기도 하였다. 이후 채응린의 8대손 금와(琴窩) 채필훈(蔡必勳, 1759~1838)에 의해 압로정만이 중건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으며, 소유정에 걸려있던 현판과 시판은 지금도 압로정에 보관되어 있다.

채응린 당대부터 압로정과 소유정은 대구를 대표하는 누정으로 알려져 대구에 부임했던 여러 지방관과 수많은 시인묵객이 정자를 방문하여 다수의 시가 작품을 남기기도 하였다. 조선 3대 시가문학 작가로 알려진 노계(蘆溪) 박인로(朴仁老, 1561~1642) 또한 소유정을 방문하여 '소유정가(小有亭歌)'라는 가사 작품을 남겼는데, 정자를 둘러싼 팔공산과 금호강의 아름다운 경치와 그 속에서 유유자적한 삶을 살아가는 선비의 모습을 여실히 보여주어 대구의 누정문화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작품이라 평가받는다.

최근 지자체에서는 금호강 주변을 새롭게 정비하여 지역의 문화 명소로 만들어 가는 작업을 하고 있다. 하지만 자전거 도로를 깔거나 강변 공원을 조성하는 것 정도로는 지역의 문화 경관으로서 금호강을 부각시키는 데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이제 지역의 인물과 역사, 그리고 문학과 예술이 살아 숨 쉬는 대구의 누정에 주목해 보는 것은 어떨까?


조유영 경북대 인문대학 국어국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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