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도자료

[우리말과 한국문학] 박목월과 식민지 나그네 신세_김주현

2021년 admin 21-04-07 510

제목: [우리말과 한국문학] 박목월과 식민지 나그네 신세

매체: 영남일보

일자: 2021-03-25

전문: https://www.yeongnam.com/web/view.php?key=20210323010003586

조지훈의 '완화삼'에 대한
박목월의 화답詩 '나그네'
일제강점기 현실 외면보단
나그네로 살 수밖에 없었던
식민지 아픔·고뇌를 읽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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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현 경북대 인문대학 국어국문학과 교수

대학시절 어느 날 후배가 나한테 물었다. 박목월의 '나그네'를 펴들고 와서 일제강점기 농민들의 비참한 현실을 외면한 이런 시를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농촌에서 제대로 먹을 것이 없어서 헐벗고 사는 판에 한가하면서도 서정적인 노래를 부를 수 있냐는 것이었다. 그녀는 현실에 침묵하거나 외면한 문학이 진정한 문학이냐고 반문한 것이다.

강나루 건너서/ 밀밭 길을//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길은 외줄기/ 남도 삼백리

이것이 '나그네'의 1~3연이다. 나는 이 시가 조지훈 '완화삼'의 화답시로 쓰여졌다는 것을 진작부터 들어 알고 있었다. '완화삼'에는 "목월에게 주는 시"라는 부제가 붙어 있는데, 전문은 다음과 같다.

차운산 바위 우에 하늘은 멀어/ 산새가 구슬피 울음 운다// 구름 흘러가는 물길은 七百里/ 나그네 긴 소매 꽃잎에 젖어// 술 익는 강마을의 저녁 노을이여/ 이 밤 자면 저 마을에 꽃은 지리라// 다정하고 한 많음도 병인 양하여/ 달빛 아래 고요히 흔들리며 가노니….

목월은 '물길은 칠백리' '달빛 아래 고요히 흔들리며 가노니'라는 지훈 시의 구절을 가져와 "길은 외줄기 남도 삼백리"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라고 고쳐 썼다. 조지훈의 시를 살피다가 이 시가 1946년 4월 '상아탑' 5호에 실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럼 지훈이 광복 이후에 '완화삼'을 썼고, 목월의 '나그네'도 광복 이후에 쓴, 말하자면 일제강점기 작품이 아니질 않은가? 그렇게 생각했다. 적어도 목월의 글을 읽기 전까지는….

몇 해 전 목월의 '나와 청록집 시절'을 읽게 되었다. 거기에는 지훈과 교유한 내용이 자세히 들어 있었다. 1942년 3월 중순 지훈이 경주를 다녀갔고, 그해 10월 조선어학회 사건이 터져 30여명의 회원들이 검거되었으며, 신변에 위험을 느낀 지훈은 월정사로 피신을 가는 길에 '낙화'를 적은 편지를 보내왔다는 것이다. 그 시의 마지막 연에서 지훈은 "꽃이 지는 아침은/ 울고 싶어라"라고 하여 도망 다니는 식민지 시인의 처량한 모습을 노래했다. 편지를 받은 목월은 경주에서 지훈이 보여준 시 '완화삼'에 대한 화답시 '나그네'를 써서 보낸다. 1943년 봄의 일로 보인다.

목월은 4~5연에서 "술 익은 마을마다/ 타는 저녁놀//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로 시를 마무리했다. 지훈 시의 "술 익는 강마을의 저녁 노을이여'라는 구절을 '술 익은 마을마다 타는 저녁놀'로 바꾼 것이다.

논란은 이 구절에 있다. 후배가 또한 많은 사람들이 비판하고 있는 것도 이 부분일 것이다. 일제암흑기 먹을 것이 없어서 굶주리고 사는 농촌 현실에, 게다가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수많은 지식인들이 검거된 마당에 술타령이 말이 되느냐는 것이다. 그래서 현실을 외면한 수준이 아니라 도피나 왜곡이라는 극평도 있다.

그러한 주장을 비판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또한 박목월을 옹호할 생각도 없다. 우리는 쉽게 타인을 비판하거나 비난할 수 있다. 그러나 과연 진정으로 이해하고 그렇게 하는가. 나는 박목월이 남긴 시들에 대해, 그가 우리말을 아끼고 사투리를 시화한 것에 대해 높이 평가한다. 마지막 구절이 현실에 대한 달관이든 체념이든, 그가 남긴 주옥같은 시편은 일제 강점기를 견뎌온 우리 문학의 훌륭한 유산이 아니겠는가. '완화삼'을 지은 지훈더러 도피와 왜곡 운운하는 것이 적절치 못하다면 목월에게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오히려 우리는 그들이 '나그네' 신세로 살 수밖에 없었던 식민지 시대의 아픔과 시인의 고뇌를 읽어야 하지 않을까?
김주현 경북대 인문대학 국어국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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