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도자료

[우리말과 한국문학] 겨울에 만난 푹한 날_안미애

2021년 admin 21-12-10 362

제목: [우리말과 한국문학] 겨울에 만난 푹한 날_안미애

매체: 영남일보

일자: 2021-12-09

전문: https://www.yeongnam.com/web/view.php?key=20211208010000904


박완서 소설 '미망'에 등장한
순수한 우리말 표현 '푹한 날'
겨울답지 않게 따뜻한 날 뜻
상반된 의미 표현한 '득하다'
'겨울다운 날씨' 가리키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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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미애 경북대 인문대학 국어국문학과 교수

정말 오랜만에 한국 소설을 읽기 시작했다. 어릴 때 읽었던 소설 중 하나다. 부끄럽게도 '읽었다고 생각했던' 소설은 '읽었다'란 말이 무색하게 낯설었다. 어른이 되어 다시 만난 소설은 예전과 달랐다. 내용보다는 우리 말들이 엮인 모습이 눈에 먼저 들어왔다. 직업병이다. 소설을 읽으며 덤으로 우리말도 다시 새겨본다. 어쩌면 이렇게 자연스럽게 말을 꾸렸을까. 소설 속 주인공들의 삶 속으로 나를 이끄는 소설가의 말은 마법 같다. 우리말을 잘 부려 쓰는 소설가의 소설이라면 멋진 우리말들을 더 많이 만날 수 있다. 오늘은 그중에 한 구절이 유난히 눈에 띄었다.

"동짓달이었다. 며칠 전 큰 눈이 한번 오고 나서 푹한 날이 계속되고 있었다."

혹시 어떤 소설 속의 표현인지 눈치챈 분이 계실지 궁금하다. 박완서님의 소설 '미망' 속의 한 문장이다. 이 문장 중에서도 '푹한 날'이 오늘 소개하고 싶은 말이다. 옛날 이 소설을 읽을 땐 어떤 뜻으로 이 말을 새기고 넘어갔는지 당최 기억이 나지 않는다. '푹한 날'. 소리 내어 읽어 보았지만 여전히 낯설었다. 머릿속엔 부사 '푹'만 맴돌았다. 예전에 이 소설을 읽을 때는 그러려니 하고 그냥 넘긴 것 같다. 그렇게 그냥 넘기며 읽었던 우리말들이 우리말을 공부하는 학자가 되고 난 뒤에야 눈에 띈 것이다.

동짓달은 음력으로 열한 번째 달인 음력 11월이다. 이 글을 쓰고 있는 12월6일인 오늘이 음력 11월3일이니 지금이 딱 동짓달이다. 그중에서도 '푹한 날'은 겨울에 가끔 만날 수 있는 날로, '겨울답지 않게 따뜻한 날'을 가리키는 말이다. 큰 눈 내린 뒤부터 '푹한 날'이 계속된다니. 겨울에만 느낄 수 있는, 겨울 햇살의 따스함이 느껴지는 표현이다. 이렇게 소설 속에서 만난 '푹하다'란 형용사가 매우 마음에 들었다.

'푹하다'의 뜻을 새기고 나니 생각나는 말이 있다. '득하다'가 그것이다. '푹하다'와는 반대되는 뜻을 가진 말이다. 같은 겨울 날씨를 표현하는 말이지만 '푹하다'는 형용사, '득하다'는 동사로, '날씨가 갑자기 추워지다'란 뜻이다. '겨울답지 않은 날씨'를 가리키는 '푹하다'와 달리 '겨울다운 날씨'를 표현하는 말인 셈이다. 이 말도 예전에 어떤 글 속에서 만난 말이었는데, 뭔가 특별한 느낌이 들어 간직하고 있었던 말이다. '겨울 날씨는 득하다가도 푹하다. 그러다 봄이 온다.' '푹하다'를 알았으니 이렇게 어울려 쓸 수도 있겠다. 우리에겐 낯선 말일 수 있지만, '표준국어대사전'에서 이 '득하다'를 찾아보면, 동음이의어 '득하다' 표제어들 중에서 1번을 달고 있다. '득하다1'. 이렇게 말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요즘 사람들이 많이 쓰는 '득하다'는 '得(얻을 득)+하다'로 만들어진 '득하다2'다.

지난 한 주는 갑자기 날씨가 득해져 한겨울이 벌써 왔나 싶었다. 그러다 주말부터 날씨가 따뜻해지는 게 아닌가. 그런 중에 '미망' 속에서 '큰 눈 내린 뒤 푹한 날'이란 표현을 만나 반가웠다. 이렇게 푹한 날씨만 계속되는 겨울이면 좋겠지만, 그러면 겨울답지 않을 것이다. 맵고 찬 '맵찬 바람'과 한창 심한 추위인 '한추위'가 지나가야 따스한 봄이 올 자리가 만들어지는 게 우리 사계절의 흐름인 것을 살면서 배웠다.

12월. 겨울이다. 겨울 날씨는 앞으로도 '득하다' '푹하다'를 반복할 것이다. 이렇게 겨울을 보내면 봄이 온다. 그러니 맵찬 겨울 날씨도 견딜 수 있는 것이다. 푹한 날도 올 것을 알고 있으니 말이다. '미망' 속 '푹한 날' 덕분에 이 겨울에 만난, 따뜻한 날이 더 특별해졌다.
안미애 <경북대 인문대학 국어국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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