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도자료

[우리말과 한국문학] 프라이팬과 솥뚜껑 연대기를 꿈꾸며_배지연

2022년 admin 22-02-21 360

제목: [우리말과 한국문학] 프라이팬과 솥뚜껑 연대기를 꿈꾸며_배지연

매체: 영남일보

일자: 2022-01-27

전문: https://www.yeongnam.com/web/view.php?key=20220126010003212



권정생·이금이 소설에 다룬
韓여성의 희생과 연대 의식
역경 헤쳐온 여성의 연대기
설연휴 다같이 가사에 참여
동지애 발휘하는 계기 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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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지연 (대구대 인문과학연구소 교수)

며칠 있으면 설 연휴다. 설이 가까워지면 할머니의 진두지휘 아래 엄마와 함께 차례음식을 준비하던 기억이 떠오른다. 엄마는 설 며칠 전부터 장을 봐서 차례에 쓸 음식들은 미리 준비하셨고, 설 전날엔 집안의 여자들이 프라이팬 앞에 붙어 앉아 차례에 쓸 전과 부침개를 몇 광주리씩 부쳤다. 종일 준비한 음식들로 설날 차례를 지내고 며칠 동안 손님을 대접하다 보면 설 연휴는 훌쩍 지나가 버렸다. 지금은 사정이 달라졌을까? 명절 전날 파업을 선언한 동서들, 시댁에서 명절을 꼬박 보내는 며느리 이야기가 아직도 영화와 드라마의 단골 소재인 걸 보면 명절 준비에 지친 여성들의 삶은 여전한 듯하다.

물론 현대 여성의 삶을 조선 시대와 비교한다면 진일보했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불과 100년 전만 해도 가부장제와 봉건적 계급 사회에서 여성은 이중적 착취를 당하는 절대적인 사회적 약자였다. 여성이 겪는 희생과 고통은 당연한 것으로 인식되었고, 공식 역사에서 여성들의 이야기는 잘 다뤄지지 않았다. 이러한 남성 위주의 공적 역사와 서사를 비튼 것이 권정생의 소설 '한티재 하늘'이다. 이 소설은 동학혁명과 의병, 3·1운동으로 집을 떠난 남자들을 대신해서 생계를 꾸리며 자식을 키워낸 할매와 아지매들의 이야기다. 그때나 지금이나 남편 없이 살아가는 것은 힘든 일이지만, 꿋꿋하게 살아남은 여성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부계 중심의 유교적 질서를 뒤엎는다. 곁을 내어주지 않는 남편에게 더는 미련을 두지 않기로 선언한 영분이 이웃 여자들과 함께 노동하며 자신의 삶을 꾸려가고, '모두가 하나님'이라는 동학 정신을 삶에서 실천하는 은애가 계급 질서에 균열을 내면서 자기 앞에 놓인 삶을 바꿔나간다.

100년 전 하와이 이주 한인들의 이야기를 다룬 이금이의 소설 '알로하, 나의 엄마들'도 그러한 여성들의 연대를 다루고 있다. 하와이에서 보내온 사진을 보고 그곳으로 시집을 간 여성들, 말하자면 '사진 신부'였던 세 친구는 낯선 땅에서 서로 의지하며 역경을 이겨낸다. 하와이 이민 1세대라고 불리는 이들은 그저 가난 때문에 조선 땅을 떠난 것은 아니었다. 가난이 일차적 이유였지만 조선에서는 할 수 없었던 공부를 하기 위해, 과부나 무당의 딸이라는 굴레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살기 위해 낯선 땅 하와이로 떠났다. 막상 하와이에 와보니 현실은 달랐다. 사진 속 신랑은 거의 스무 살 이상 차이 나는 중늙은이들이었고, 기대와 달리 그들은 이주노동자의 아내로 가난하게 살아야 했다. 언어도 통하지 않고 가족도 없는 곳에서 하와이 이주 여성들은 서로를 보듬고 달래며 서로의 가족이 되었고, 그 힘으로 험난한 시간을 헤쳐나갔다.

역사 자료와 구술사에서 건져낸 사실을 바탕으로 한 이들 소설은 특정한 누군가의 이야기를 넘어 우리네 할머니들, 엄마들의 이야기다. 그래서 그들의 이야기는 울림이 크다. "파도처럼 온몸으로 세상과 부딪치며 살아갈 것"이라는 소설 속 인물의 말과 같이 인생의 수많은 파도를 넘어서며 살아온 그네들처럼 우리 또한 살아갈 것이다. 여성의 연대를 다룬 이 소설들은 남성-여성이라는 성 대결의 구도가 아니라 인간에 대한 이해의 관점에서 읽어야 한다. 버거운 일들을 감당해가는 누군가에게 손을 내밀어 일어설 힘을 보태고 곁을 내어주는 것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다. 이번 설에는 엄마와 아내, 제수씨에게만 설 준비를 맡기지 말자. 프라이팬 앞에서 전을 함께 부치고, 설거지를 함께하며 설 연휴 동지애를 발휘하면 어떨까? 이러한 설날의 연대기가 또 다른 연대의 마중물이 되어 고고하게 이어지기를 기대해본다.

배지연 (대구대 인문과학연구소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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