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논문(3단계)

김주현/참여교수/(단재 신채호의『권업신문』활동 시기에 대한 재검토)

2013년 관리자 15-10-27 1,154

김주현(2015), 단재 신채호의『권업신문』활동 시기에 대한 재검토 , 한국독립운동사연구 51,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5-44.

목차
1. 머리말
2. 「루령 거류 조선인의 문제」의 정확성 문제
3. 역사 관련 글의 맥락
4. 주필의 삶과 글의 흔적들
5. 1913년 권업신문 주필은?
6. 맺음말

내용요약
단재가『권업신문』에 활동한 시기에 대해서는 논란이 여전하다. 특히 단재가『권업신문』을 그만둔 시기는 1912년 9월에서 1914년 8월 폐간 때까지 실로 차이가 많이 있다. 최근에는 가장 이른 시기로 1912년 9월에, 가장 늦은 시기는 1913년 7월로 그 간극이 좁혀졌지만 여전히 논란이 되고 있다. 본고에서 본 연구자는 일본의 정보보고 문서를 근거로 기존의 논자들이 말하는 1912년 9월 주필 사임설을 부정하고 단재가 1913년 7월경까지 블라디보스토크에 머물며 논설 등을 발표했음을 논증하였다. 우선 1913년 1월 초까지 블라디보스토크에 머물렀음은 백원보의 편지를 통해 입증하였다. 그것은 또한「중국혁명사략」이 1912년 5월부터 같은 해 10월 27일까지 실린 사실로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아울러 1912년 2월 16일에 발표된「단군 시대의 시」,「사법명의 무공」이 단재의 글임을 밝히고, 단재의 흔적이 드러나는「광무 을사 이전의 본국신문」 1913.2.16.),「발칸반도에 새로 흥하는 세 나라」(1912.11.24.~12.2.),「몬테네그로대왕 니콜라스의 이야기」(1913.1.26.), 그리고 계봉우와 장도빈의 언급을 통해 단재가 1912년 9월 주필란에서 이름이 빠진 이후에도 여전히 논설 등을 썼음을 밝혔다. 특히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신채호씨와 한 旅館에 留宿하여 수년간을 함께 있었다”고 장도빈의 증언은 주목할 필요가 있다. 장도빈은 1912년 4월 말경에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하여 1914년 봄에 그곳을 떠났는데, 비록 과장이 있다 하더라도 단재와 블라디보스토크에 함께 머문 시간은 1년을 넘었으리라 짐작해볼 수 있다. 또한 일본의『외교시보』에서는 1913년 7월경까지 단재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권업신문 주필이었음이 언급되어 있다. 무엇보다도 앞에서 언급한 글들이 1912년 9월 이 후에도 단재가 여전히 블라디보스토크에 머무르며 글을 썼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결론적으로 단재가 1913년 7월경까지 블라디보스토크에 머물며 권업신문에 참여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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