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도자료(3단계)

[우리말과 한국문학] 한국어가 학술어로 발전해야 하는 까닭

2019년 bae 19-11-29 786

제목: [우리말과 한국문학] 한국어가 학술어로 발전해야 하는 까닭

일자: 2019-11-28

매체: 영남일보

전문: http://www.yeongnam.com/mnews/newsview.do?mode=newsView&newskey=20191128.010300815410001


공공어·학술어 제도적 기반

광복 후 70년간 비약적 발전

2000년 전후 공공기관 등서

영어 표현 남발 등으로 위협

학술어 발전 장애물 안돼야


말하는 행위는 사람의 신체 활동과 정신 활동의 동시적 실현이다. 독일의 위대한 언어철학자이자 뛰어난 행정가로서 근대 대학제도를 만든 훔볼트는 언어의 이러한 특성을 두고 언어의 차이가 세계관의 차이를 만든다고 했다. 한국인은 한국어로, 프랑스인은 프랑스어로 세계를 바라본다는 것이다. 말은 의사소통 수단 이상의 그 무엇이다.

한 언어가 제구실을 하려면 언어가 사용되는 다양한 쓰임새에 부응할 수 있어야 한다. 언어의 기능은 여러 가지 관점에서 설명할 수 있다. 언어가 사용되는 사회적 위상을 기준으로 언어의 기능을 보면 크게 셋으로 나눌 수 있다. 생활어 기능, 공공어(公共語) 기능, 학술어 기능이 그것이다. 생활어는 개인의 일상생활과 가정에서 쓰이는 말이다. 어떤 언어가 가정을 중심으로 한 일상생활어 차원에서만 쓰인다면, 그 언어는 세대가 이어져 가면서 점점 위축되고 머지않아 소멸의 운명을 겪게 된다. 공공어는 방송, 언론, 공문서 등 공공적 차원에서 기능하는 언어이다. 하나의 언어가 공공어 기능을 수행하려면 국가와 사회의 제도적 뒷받침이 필요하다.

학술어는 학술적 성격을 띤 논문과 논설문, 그리고 대학의 강의와 학술 저서에서 제구실을 하는 언어를 말한다. 세계 대부분의 언어가 이 기능을 못하고 있다. 하나의 언어가 학술어로서 기능한다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학술어 기능은 공공어 기능을 뒷받침하는 샘물과 같다. 공공어 기능을 제대로 하는 언어는 생활어로서도 모자람이 없게 마련이다. 학술어로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는 언어는 공공어와 생활어 기능을 제대로 할 수 없다.

한국어와 한글이 학술어로 제구실을 하게 된 것은 불과 100년도 되지 않는다. 조선시대의 한글은 공공어를 뒷받침하는 문자로 쓰이지 않았고, 학술어는 더더욱 아니었다. 조선의 모든 공문서와 학술문에는 철저히 한문을 썼다. 성리학서, 역사서, 천문학서, 의학서 등을 모두 한문으로 썼다. 한글은 외국어 학습서, 음식조리서, 구급방, 병사의 훈련교육서 등의 실용서에 쓰였을 뿐이다.

한글이 공공어 및 학술어로 첫걸음을 뗀 것은 갑오개혁 이후 한글이 나랏글 즉 ‘국문’이 되고부터이다. 1894년에 고종이 내린 칙령 제1호 공문식(公文式)에서 공문서를 국문으로 쓴다고 법제화했다. 이때부터 한글은 공공어의 길로 나아갔고, 서양의 학문과 지식을 번역하고 소개하는 학술서의 문자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1910년에 일제의 한반도 강점으로 한글과 한국어는 조선문과 조선어로 격하되는 한편, 일본어와 일본 문자에 국어와 국문의 자리를 빼앗겼다. 1945년 광복과 함께 미군정이 실시되었고, 이어서 대한민국 정부가 세워지고 헌법이 제정되었다. 민주주의 체제가 확립되면서 한국어와 한글은 비로소 공공어와 학술어 기능을 할 수 있는 제도적 기반을 갖게 되어 1945년부터 오늘날까지 70여 년 동안 공공어와 학술어로서 커다란 발전을 이루어냈다.

아직도 한국어의 학술어 기능은 갈 길이 멀다. 그런데 2000년을 전후하여 우리말과 우리글이 학술어로 발전해 가는 길에 심각한 위협과 장애물이 연달아 생겨났다. 공공기관은 공공어 제정에 영어 표현을 남발하고(예: Colourful Daegu), 대학은 교수들에게 영어 강의와 영어 논문을 요구하고 있다. 대학 평가를 할 조직과 능력을 갖추고 있는지 의심스러운 신문사가 영어 강좌의 수를 평가 잣대로 삼기도 한다. 이것들은 한국어의 학술어 기능을 저하시키는 심각한 위협이다. 영어 강의는 필요한 부분에서 시행하면 되고, 국제적으로 활동하는 학자는 영어 논문을 쓰면 된다. 노벨상 수상자가 많은 일본의 대학이 영어 강의와 영어 논문 쓰기를 강요한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다. 공공기관과 신문사가 한글이 공공어와 학술어로 발전해 가는 길에 장애물을 놓아서 되겠는가? 조선시대에는 한문 숭배 사대주의가 있었고 오늘날은 영어 숭배가 그 자리를 꿰찼다. 한국어가 학술어로 계속 발전해 가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깊이 생각해야 한다. 이 과업은 한국어를 작동시키는 힘의 원천이자 심장부를 지키는 길이다.
백두현 경북대 인문대학 국어국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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