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도자료(3단계)

[우리말과 한국문학] 일제 징용자가 아내에게 쓴 한글 편지

2020년 ssy0805 21-03-03 510

제목: [우리말과 한국문학] 일제 징용자가 아내에게 쓴 한글 편지

매체: 영남일보

일자: 2020-02-06

전문: https://www.yeongnam.com/web/view.php?key=20200205010000680


1945년 2월9일 쓴 편지엔
언제 폭탄 떨어질지 모르는
생사 기로의 상황이 생생히
군대식으로 징용자 편제한
미쓰비시의 만행도 드러나 


"처음에 나고야를 와서 보니 접전지와 다름없네. 날마다 적기가 백여 대씩 날아와서 폭발시키고 가네. 낮에는 적기가 오면 밥을 먹다가도 먹든 밥을 버리고 도망하고…."

이 문장은 일제에 징용되어 목숨을 잃을 상황에 처한 이운상이란 분이 고향의 아내에게 쓴 편지(개인 소장)의 한 구절이다. 편지 겉봉의 발신자 주소는 "나고야시 남구 본성기장(名古屋市 南區; 本星崎長) 미쓰비시 제4료메이 숙사 제4구대 제14중대(三菱 第四 菱明寮 第四區;隊 第一四中隊內;) 李山云相"이다. 편지 겉봉에는 나고야 우체국 소인 두 방이 찍혀 있다. '李山云相'(이산운상)은 창씨 개명을 강요당한 이운상이 일본식의 네 글자 이름으로 바꾼 것이다. '제4구대 제14중대'라는 주소지 표현 방식은 이운상이 징용되어 일본 기업 미쓰비시(三菱)사의 군대식 막사에 기거했음을 보여준다. 미쓰비시 회사는 징용자들을 군대식으로 편제하여 숙소에 집단 배치했음도 이 편지가 증언하고 있다. 현재의 나고야에는 발신지 주소와 거의 동일한 료메이 미쓰비시(菱明 三菱) 전기기기 판매회사가 등록되어 있다. 이 회사가 바로 1945년의 이 편지에 등장하는 료메이 숙사 미쓰비시사의 후신일 듯하다.

이 편지의 수신자는 '조선 전남 영광군 홍농면 월암 풍암부락'에 산 '李山炳千'이다. 원래 이름 이병천(李炳千)을 일본식으로 개명한 것이다. 편지 사연은 빨리 귀국할 수 있도록 급히 전보를 보내라는 간절한 부탁이다.

편지 본문은 편지지 석 장에 펜으로 쓴 것으로 언제 죽을지 모르는 절박한 상황이 그려져 있다. 날마다 미국 공군기가 공중 폭격을 가하여 조선 사람 수십 명이 죽었고 이들을 화장하여 유골을 고향으로 보냈다는 사연도 있다. 폭격으로 부서진 집의 잔해를 치우는 노동에 동원되어 두 달 동안 죽을 고생을 했으나 노임은 한 푼도 받지 못했다고 했다. 영광에서 함께 징용대에 끌려왔던 대장은 도망쳤고, 남은 사람 중에 급한 전보를 받고 돌아간 사람도 있다고 했다. 이운상은 아내에게 "나를 다시 보려거든 하루라도 바삐 급한 전보를 치고, 만일 그리 않고는 내 얼굴을 다시 보기 어렵네"라고 하며 전보를 급히 치라고 당부했다. 이 말 뒤에는 "만일 아부지가 아시고 이 편지를 보면 큰 불효자가 될 것이니 아부지께는 이 말을 여쭈지 마소"라는 당부도 덧붙이고 있다.

이운상이 이 편지를 쓴 날짜는 1945년(소화 20년) 2월9일이다. 이때는 일본 공군이 궤멸되었고 미군 폭격기가 고베, 나고야, 도쿄 등 대도시에 소이탄을 쏟아붓던 시기였다. 나고야 소재 미쓰비시 공장에 군수품 노동자로 징용된 이운상은 언제 폭탄이 쏟아질지 모르는 나고야에서 생사의 기로에 처해 있었다.

편지를 쓴 이운상이란 분이 과연 살아서 돌아왔는지 궁금하여 홍농읍 사무소 직원과 풍암마을 이경태 이장과 친지 이경해씨와 차례로 통화하였다. 드디어 이운상의 장남 이희영 선생의 전화번화를 받아 그 후일담을 들을 수 있었다. 이운상 선생(1924~1993)의 편지를 받아본 부인은 오영길 여사(1926~2013)였다. 이운상은 고향에 돌아와서 야학을 열어 마을사람을 가르쳤고 슬하에 7남1녀를 훌륭히 길러내셨다. 이 편지를 받은 부인이 급히 전보를 쳐서 사지에 처한 남편이 돌아올 수 있도록 했음이 분명하다. 살아남은 이운상의 성취를 듣고 한 사람의 생명이 얼마나 소중한 것임을 새삼 느꼈다.

백두현 (경북대 인문대학 국어국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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